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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Movies

[MOVIE] 앵무새가 된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그대들은 어떻게 살것인가

미야자키하야오 감독이 7년에 거쳐 만들었다는 자전적인 작품
마치 "나의 삶은 이렇습니다만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실 건가요?" 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자기 머리를 돌로 내려찍는 마히토

 

 대깨돌(자기 대가리를 돌로 내리찍는...) 주인공 마히토는 씩씩하고 의젓한 척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소년입니다. 전쟁 중 화재로 재가 되버려 시신조차 보지 못한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며 잠들고, 아기가 생긴 새 엄마과 아빠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다이나믹 속에서 새 엄마가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오히려 관심 없는 척 굴기도 하죠. 자동차를 끌고 화려하게 전학 온 학교에서는 잘난 도련님이라 오히려 질투와 왕따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히토는 사랑받고싶지만 어린애처럼 징징거릴 수 없다는 마음에 돌로 자기자신을 내리찍으며 자기에게 벌을 주는 선택을 합니다. 어른아이가 된 마히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자기에게 해를 가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도 싶었습니다. 마히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온몸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저를 보호해주세요. 저를 봐주세요. 저는 너무 슬프고 사랑이 필요해요.'
 이 작품을 통해서 미야자키하야오는 어른아이가 되어버렸던 어린 자기자신을 돌아보며 아직도 남아있는 자신의 내면아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사랑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내면아이를 그만 다그치고 안아줘야만 진짜 어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때의 마히토에게는 사랑이 필요했고 그 사랑을 머리를 내려찍어야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돌로 내려찍은 상처는 마히토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는 머리를 기르면 가려질 수 있다고 했지만 마히토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을 여행하며 마히토의 상처는 더 이상 사랑을 갈구하던 내 모자란 모습의 증표가 아니라 용기의 증표가 됩니다. 내가 겪은 이 슬픔을 이겨내고 겪어내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성장의 증거가 됩니다.

 

엄마의 죽음(상실)을 수용하기

 저는 탑의 세계가 마히토의 내면의 자아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라는 단어조차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마히토 대신 왜가리는 '엄마!'라는 단어를 크게 외치며 탑으로 사라집니다. 엄마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간 탑에서 만난 엄마는 여러 모습이었는데요. 처음엔 물로 만들어진 가짜 엄마모형, 멀티버스 속의 소녀의 모습으로의 엄마, 그리고 새 엄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또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분노 - 회고 - 수용. 죽음을 부정하고 내 눈앞에서 물흐르듯 사라져버린 그 사람의 생명앞에서 분노하고, 사라져버린 시간과 추억들에 분노하고, 다시 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빠져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녀의 모습을 한 엄마(히미)와 음식을 먹고 시간을 보내듯이 그 추억들을 다시 곱씹고 기억을 재구성하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걸 그리워하게 될 때까지 모든 것들을 추억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희망을 품고 수용합니다. 어딘가에 그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을 거라고, 우린 다시 다른 모습으로 만날거라고요.

 

 전쟁속에 잃어버린 엄마, 임신한 새엄마와 바쁜 아버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히토는 자신을 꾹 닫고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하지만 사실 다정한 새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잃어버린 새엄마를 찾아들어간 산실에서 마히토에게 '네가 정말 싫어!'라고 소리지르는 새엄마는 어쩌면 마히토의 마음속의 두려움의 실체였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적도 없지만 마히토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은 바로 새엄마에게 거부당하는 것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막상 새엄마가 자신을 거부하자 그제서야 엄마라고 부르며 나츠코에게 안기려 안간힘을 다하지요. 마히토는 사랑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그냥 무서웠던 거에요.

 

 히미와 마히토의 가장 큰 적은 앵무새들인데요. 탑의 세계에는 인간을 잡아먹고 코끼리도 잡아먹을 수 있다는 앵무새들이 가득합니다. 히미와 마히토를 잡아먹기위해 맹목적인 군인들처럼 행동하며 멍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행동하는 앵무새들. 마히토의 내면인 탑에 가득 차 있는 앵무새들이 저는 어쩌면 자꾸만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우울과 불안, 아니면 몰려오는 슬픔들이 아닐까요. 슬픔이 나를 덮쳐서 삼켜버릴 것 같을 때 우리는 앵무새들처럼 멍해지고 바보가 되어 무의미한 행동이나 역기능적인 방어기제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도 하고, 자기자신을 굳세게 걸어잠그고 더 통제하려고 하기도하고, 혹시라도 새어나온 감정이 나를 무너뜨릴까봐 입을 더 꾹 다물고 도망가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걸 사회에서 미덕이라고 배워왔기도 하고요. 감정적인 것이 미성숙하고 모자란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사회는 우리를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가 앵무새가 되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히미를 제물로 바쳐 이 세계를 앵무새들로 덮어버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슬픔을 겪을 때 이겨내지 못하면 그 이유를 제물삼아 슬픔에 내 모든 세계가 지배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메세지 같았습니다. 마지막까지도 '규칙', 그냥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기준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앵무새왕이 아이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 세계를 박살내버리면서 히미와 마히토는 헤어지게됩니다. 그 때 마히토는 이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를 선택하며 수용하게 됩니다. 단단한 돌이 깨어지면서 마히토의 어그러진 내면세계는 틀어지고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헤어짐의 직전 마히토의 엄마가 되기 위해 떠나는 히미는 자신이 불에 타죽을 걸 알지만 너와 다시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하고 가슴벅찬 일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모든 선택은 우주에게 달려있고 우리의 삶은 평행선 위에서 반복되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의 몫이니까요.

 

삶의 모든 순간은 영원하다

 영원한 동일의 회귀. 제가 좋아하는 니체의 회귀사상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각각의 멀티버스가 반복된다는 점이 이야기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의미인데요. 어떤 분은 영원히 반복되면 대충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던데, 그 말도 맞습니다. 대충 산다는 것도 그 순간에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게 아닐까요?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다시 이 삶을 똑같이 반복해서 살라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사는 것이 영원회귀사상의 메세지인데요. 우리는 항상 그 순간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왔고, 그러니 그게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우리는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또 슬퍼할 걸 알지만 사랑을 해왔고, 또 눈물 흘릴 걸 알지만 함께하기를 선택해왔고, 우리는 죽을 걸 알지만 삶을 선택해왔습니다. 

 우주의 모든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뇌는 모든 내 앞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서 우리를 생존시킵니다. 벼락을 맞아 죽은사람, 로또에 당첨된 사람, 길에서 트럭에 치인사람... 아무런 이유가 없이 일어난 랜덤한 일들을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같은 말도안되고 비논리적인 이유라도 우리는 의미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무런 이유도 없고 내 앞에 나타난 이사람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거라고 믿고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의미를 만들어 내는게 우리가 아무런 논리도 없는 우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의미를 당신들의 삶에 부여하며 살아가실 건가요? 아니면 앵무새가 되어 맹목적으로 살아가실 건가요?

귀여운 와라와라들